일은 자아 찾기 과정이 아니다
컴퓨터 역할을 하는 머리는 사물을 대상화하고 인식하여 모든 것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특성이 있다. 그렇지만 머리는 질 자체를 직접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양에 적용시킨 형태로밖에 대상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칫 대상 자체의 본질에서 벗어나 수단이나 부산물을 목적이라고 잘못 파악하기가 쉽다. 수단을 자기목적화하거나 결과만을 단편적으로 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모두 이러한 머리의 착오로 인식된 것일 뿐이라고 말해도 좋다. 고학력을 달성하고 일류 기업에 취직해 높은 사회적 지위와 수입을 얻는 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 다양한 것을 배우게 하는 일 등 많은 사람이 기를 쓰고 좇는 가치는 원래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그들 수단 자체가 목적으로 변질된 것이다.
한편 우리의 본능적 부분인 '마음=몸'은 질을 직접 감지하고 맛볼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마음=몸'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중심이며, 마음과 신체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는 것은 결코 가치 있는 일을 이뤄서가 아니라 '마음=몸'이 다양한 일을 맛보고 행복을 느낌으로써 실현된다.
이번 장에서 생각본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혹은 빠져나오는 일이다. 진정한 자신은 어딘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마음=몸'을 중심으로 한 생명체로서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옴으로써 달성된다.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이즈마야 간지
한때 나도 목표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스트레스가 많은 환경에서 나 자신을 혹사시켰다. 내가 일했던 일터는 겉으로는 '멋있어' 보였지만, 노동 시간과 강도가 세고 급여는 적었다. 사람들은 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서로에게 못되게 굴기도 했다. 이 안에서 누군가는 꿈(목표)를 이뤘고 못 이룬 누군가는 그를 부러워하면서 계속 목표를 쫓았고, 누군가는 그런 이들을 싸게 부려먹을 수 있었다. 이제 돌이켜보며... 그 과정이 별로 즐겁지 않았으며 나에게 가혹했다는 걸 깨닫는다. 한때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공간을 접할 수 있는 그 일이 재미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의 더 큰 본능은 자연에 더 가까운 삶을, 사람들과 덜 부대끼는 삶을 원한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더 너그럽고 따뜻할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 대충 때우는 끼니가 아니라 계절에 맞는 재료의 느긋한 식사를 원한다. 나는 책과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만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다. 그건 내가 영화 감독이 되거나 되지 않아도 변하지 않을 부분이다. 물론 내가 영화 감독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더 인정해주겠지만, 나는 원래 사람들의 인정에 별로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목표를 쫓았던 것은 목표한 것을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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